12월의 독립운동가 부재(溥齋) 이상설 선생
12월의 독립운동가 부재(溥齋) 이상설 선생
  • 대한뉴스
  • 승인 2005.12.0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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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한국의 독립의지 천명

국가보훈처는 최근 12월의 독립운동가로 광복회ㆍ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이상설(1870. 12. 7~1917. 3. 2) 선생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이상설 선생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이후, 성균관 교수 겸 관장ㆍ한성사범학교 교관ㆍ궁내부 특진관ㆍ학부협판ㆍ법부협판ㆍ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904년 6월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보안회 등과 함께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선전하는 활동을 펼쳐 철회하게 만들었고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강탈하자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선생은 1906년 국외로 망명하여 북간도 용정에서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펼치던 중,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광무황제의 외교특사로 임명되어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일본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지만, 헤이그에서 이준·이위종과 함께 각국 대표들에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열렬히 주장하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계 언론인들에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관건임을 널리 알려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이후 1908년 미국을 방문하여 재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을 촉구한 뒤 노령 연해주로 돌아와 1910년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 방면의 의병을 규합하여 13도 의군을 편성하였으며, 경술국치 직후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의지를 밝혔다.


일제 강점 이후에도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그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5년 상해에서 신한혁명당을 조직하는 등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7년 3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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