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이세산업 이완수 회장, 건설의 날 철탑산업훈장 수상
(주)이세산업 이완수 회장, 건설의 날 철탑산업훈장 수상
40여년 건설인의 삶 공적 인정받아
  • 김남규 기자 wolyo@korea.com
  • 승인 2015.07.1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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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김남규 기자] 최근 성대하게 개최된 건설의 날 시상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총 26명의 건설 유공자를 포상하고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중 철탑산업훈장을 받은 (주)이세산업 이완수 회장은 현재 40년간 건설업의 종사하며 건설의 역사와 함께 걸어왔다. 또한 국가적 주요 활동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내어 상을 받은 만큼 이날 시상식에서 주목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철탑산업훈장을 받는 (주)이세산업의 이완수 회장

민간지역 최초로 북한 옥수수 저장 창고 건설

75년 사업을 시작하여 벌써 40년을 맞이하고 있는 이완수 회장. 이번 건설의 날에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하여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이 회장은 북한에 옥수수 저장창고를 신축 제공하여 향후 남·북 민간건설협력에 있어서 중요한 중점적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다는 공로가 인정되기도 했다. 또한 주한미군공사인 FED공사, 공군공병부대 레이더 기지공사 등에서 특수공법을 적용, 시공하여 자주국방 기반 확립 하는데 공헌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단순한 건설현장의 차원을 넘어 국가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 있는 공사를 수행함으로써 그 진가가 더욱 돋보이는 부분이다. 북한의 경우, 분단이후에 각 분야에서 많은 지원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민간인 지역에서 기술자를 데리고 공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것이 최초다.

당시에 대해 이완수 회장은 “북한에 직접 가서 공사를 한 것은 아마 최초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옥수수학자 경북대 김순권 박사님을 알게 돼서 당시 공사를 진행하게 됐다”며, “당시 김순권 박사님은 98년부터 김정일 초청으로 북한에 처음으로 가신 분으로 북한의 경우 식량의 70%가 옥수이고 30%가 감자나 쌀인데 옥수수 종자개량을 김정일로부터 부탁받아 슈퍼옥수수 개량을 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지금과 마찬가지이지만 북한의 식량사정이 좋지 않은 관계로 옥수수개량 사업은 북한의 숙원사업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당시 김정일이 박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북한 지역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해 최초로 북한지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고, 이렇게 북한지역을 돌아다니던 김 박사는 옥수수 종자 창고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해 이를 이 회장과 상의했다고 한다.

“옥수수 종자 창고라는 것은, 옛날 시골에서는 내년에 심을 옥수수를 매달아 두었는데 이것이 잘 안돼서 습도 4도씨 냉장 보관이 필요했고 이를 5군데 계획했다가 1차로 평양시 인근 2시간 거리에 위치한 어느 곳에 만들게 된 것”이라 설명했다. 통일부의 승인을 받아 진행된 이 공사는 기술자 6명 등과 함께 들어가 직접 설계하여 2007년부터 2008년 3월까지 자제가 들어가 조립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후 평양인근에 진행하고 원산 쪽도 계획했지만 그곳에 중요한 비행장 군사기지가 있어 진행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2호까지 진행된 공사는 당시 천안함 사건이 터지면서 523조치가 내려져 결국 3년 정도 못 들어가게 되었다. 이 회장은 “그 후에는 김 박사님이 1년에 한두 번 북한에 들어간다. 또 중국에 김 박사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실험농장이 있어서 북한의 옥수수 개량 연구를 그곳에서 하게 됐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분단 이후 민간지역에서 건설이 이루어진 것으로 옥수수 종자 창고라는 기념비적인 일이 진행된 것이다.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지만 항상 최선의 노력

이완수 회장은 75년, 사업 초기에는 당시 임원과 공동경영을 하다가 77년, 경서건설주식회사로 독자적 경영체계를 확립했다. 70년대 레미콘도 없어서 철판에다 직접 비벼가며 공사를 하던 시절.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토목에다 도로면허까지 있던 이 회장은 현장에서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났었다. “한참 박 대통령 시절에 4~5차 건설물량이 꽤 많아서 도로 포장 면허를 갖추어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죠. 대신 단가가 매우 쌌었지만. 그리고 군대 공사를 들어가면 손해 안 나면 다행이라던 시절에 오산비행장, 대방동에 야전공병대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구일전대 90%이상을 우리가 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오퍼나 특수공사 분야는 노하우가 없으면 못하는 상황이라 수주량이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이세산업의 성장은 당시에 강원도 도로포장의 90%를 다 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더욱이 이렇게 강원도 도로포장공사를 도맡다 보니 강원도지사의 특별한 주문도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80년대 초 골프장 인허가가 어려웠던 시절이다. 지금의 춘천CC를 두산에서 하는데, 우리가 강원도 도로포장 많이 하니까 강원도지사가 제안을 했어요. 강원도에도 골프장이 있어야 하겠는데 만들어 달라며 연락이 왔었다. 조건은 서울의 어려운 학생들이 오면 도별로 기숙사 비슷한 게 필요한데 약 200명 정도 생활할 수 있는 기숙사 하나를 지어달라는 것”이었다며, 그래서 35만평 골프장을 건설하기로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가증은 나왔지만 공사는 시작도 못했다는 이완수 회장. “당시 서교호텔 운영, 85년 크리스탈 백화점 직영 등 건설까지 총1300여명의 한 달 월급으로 25억 원을 지출 했다. 여기에다 호텔 지을 때 땅만 있지 건축비는 다 금융기관 차입이라 일 년에 직원 월급이 300억 가량 들어가는 상황으로 결국 호텔과 백화점 등은 모두 선배가 하고, 나는 건설 쪽에만 치중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잘나가던 시절에 무리한 확장이 원인이 된 것이다.

▲이완수 회장과 가족들

“돈을 뒤로 빼돌린 것이 아니라 의욕적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뢰는 잃지 않았다. 그 덕에 다시금 시작할 수 있었다”고 웃는 이완수 회장. 그래서 이후에는 경서건설에서 89년 (주)이세산업을 창업하며 오로지 건설인의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월남 파병까지 갔던 장교출신으로 건설인으로 살아온 삶. 70여년 인생에 있어서 그에게 이번 수상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완수 회장은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다. 양천구 목동에 52주년 성문교회로 83년, 현재의 교회를 봉헌하기도 했다. 그리고 84년도부터 장로로 봉사하다 교회법상 70세 정년의 길을 맡아 지난 4월에 원로장로로 추대되기도 했다. 또한 교회가 모여서 노회가 되고, 노회가 모여서 총회가 되는데 대한예수교장로교 합동총회의 부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삶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항상 최선을 다하며 달려온 인생. 한 길을 걷는다는 것이 힘든 여정이기는 하지만 철탑산업훈장은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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