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장인정신으로 한국 웨딩사업을 이끈 선구자적 역할.
20년 장인정신으로 한국 웨딩사업을 이끈 선구자적 역할.
‘이명순 웨딩’의 대표 이명순 원장.
  • 대한뉴스
  • 승인 2011.03.0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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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화사한 웨딩드레스가 정인간의 추억과 행복을, 여름에는 정열적인 웨딩드레스가 청춘의 감성을, 가을에는 모던한 페이스가 가족을 행복하게 하고 겨울에는 클라식한 웨딩드레가 연인의 마음을 녹이고 이 종합적인 하티스트인 심플한 라인이 한 여성의 마음을 움직였다. 모두가 뭐라해도 오직 한 길만을 걸은 여성웨딩디자이너 바로 ‘이명숙웨딩’의 원장인 이명순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한국웨딩사업의 태동인 1989년에 이명순<左 사진>웨딩드레스를 오픈한다. 그때만 해도 전문적인 웨딩디자이너가 드물었다. 물론 어깨너머로 혹은 외국에 유학을 갖다온 해외파들도 있었지만 국내웨딩시장은 과거나 지금이나 대여업이었기 때문에 곧 일반 유행패션디자이너로 돌아섰다. 전문가의 길을 걷고 싶어도 하고싶은 여력이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명순원장은 처음부터 매시즌마다 트랜드 맡게 ‘심플라인’을 접목해 여성의 청순미와 우아함을 표현하였다. 몇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모토가 있었으니 바로 ‘심플라인’이다.

이원장은 “너무 유행에 맞게 웨딩드레스를 고집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개성이 있는 ‘로망’의 드레스가 있어야 합니다. 전문가와 상의하여 고품격된 나만의 드레스를 입어야 합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원장의 세대의 웨딩드레스는 자신들의 개성을 무시한 통소매, 로웨스트 형태였다. 키가 크거나 작거나를 떠나서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그런 유행(?)드레스가 열풍처럼 불어쳤다.

마치 키작은 신부가 입으면 휠체어를 타고 온 느낌이 될 정도다. 아마도 비교하면 지금 필리핀에서 유행하는 그런 촌스런 느낌이다. 그런 시대에 이원장은 자기 결혼식때에는 과감하게 통소매 로웨스트차람을 버리고 자신이 직접 디지인한 날씬한 ‘심플라인’을 살려 주위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신부의 부모들은 그녀의 웨딩드레스차림을 보고 “어떻게 저런 선정적인 옷을! 보인다 보여 끼가....”하며 비웃었다.

그런 그녀가 선택한 ‘심플라인’이 현재 대세인 웨딩드레스의 모형이다. 한 마디로 당시 20년 앞선 생각을 가진 케리어 우먼이었던 것이었다.

이원장이 고집하는 웨딩드레스의 디자인 포인트는 실루엣과 선을 강조. 전체적인 밸런스를 우선시하고 심플한 라인이 주는 우아함을 강조하기 위해 입체적인 패턴을 사용한다.

한마디로 빛이나고 여성미를 살려주는 것이다.

모호한 웨딩드레스는 싫다.

이명순원장이 본격적인 웨딩드레스사업을 시작한 20년전에는 1등 신부감으로는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오로지 집안일만 담당하던 즉 현모양처 스타일이었다. 그때는 연애보다는 중매를 선호했고 결혼에 관해서는 부모의 권한이 컸다. 물론 한 번 입을 웨딩드레스의 선택권은 신부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부모에게 있었다. 그때에는 보수적인 가격,디자인이 대세였다. 그때에는 한 번 유행이 터지면 입소문으로 화재의 브랜드가 열병처럼 전국을 휩쓸때다 마침 오늘날의 구제역처럼. 모양이 아무리 후져도 “아 그 브랜드! 진짜 드레스지.”하며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야 할 결혼식장은 유행이 뒤져도 한 참 뒤진 열병표 브랜드가 예식장으 주인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외국사람들은 겉으로는 “오 비유티풀 아름다운 신부입니다”하며 엄지 손가락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아이구 저런 촌순이, 촌돌이들이 있나 현재보다 10년이나 뒤진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다니 한국사람 패션 알만하구만..”하며 비웃었다.

이원장은 “그때에는 개개인이 개성이 무시되는 시대였습니다. 부모의 ‘게’눈 패션이 예식장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죠.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당시 제가 주창한‘ 심플라인’은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에도 이원장은 한 발 앞선 실루엣과 전체적인 밸런스를 우선시하는 심플한 라인이 주는 우아함을 강조했다. 오직 그것만이 오늘의 웨딩시장을 살릴 수 있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인정신으로 웨딩사업을 고수했다.

그녀는 또 Ree Hue Closet를 강조해 파티를, 결혼식장을 빛내줄 화려함을 기본으로 사랑스럽고 로맨틱한 디자인에 중점을 두어 현 시장과의 차별화를 두었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감상 하나도 놓지지 않고 다자인에 반영하는 강수를 두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상상을 못했던 것이다.

이때 이원장은 20년 앞을 내다보고 웨딩시장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당시에 열풍이 불었던 웨딩드레스 브렌드는 모두 외국산 이었다. 그때에는 ‘지적소유권’도 정착되지 않은 시대였고 복제품이 많았어도 단속이 심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짜가’가 판을 치던 시대였던 것이었다. 이원장은 자기가 주창하는 ‘심플라인’에 몰입했다. 모두가 백설공주처럼 풍성한 시절에 여성의 청순미, 우아함을 강조했던 것은 그녀 뿐이었다. 웬만한 웨딩 사업가들은 외국 브렌드만을 수입했고 여기져기 복제품이 널려있을 때였다.

이원장은 이렇게 어려울때에 자신만의 철학으로, 감성으로, 열정으로 웨딩사업을 이끌어 갔다. 여자들 모두가 아름다워 질수 있다는 주장으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간 것이었다.

“아름다운 여성은 때와 장소에 맞는 옷차림을 해야 합니다. 시간과 장소에 맞춰 조금만 옷차림에 신경을 쓴다면 언제 어떤 곳을 가도 항상 당당할 수 있죠”라고 강조했다.

즉 패션에도 무작정 뛰는 것과 돋보이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 여성들이 시간과 장소를 고려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갖춰 입어 아름다움을 왼성하자는 것이다.

자신의 개성을 살리는 것만이 진정으로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행복을 위한 선택권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누구의 강요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만의 개성에 있다는 것이다.

이원장은 “드레스를 디자인 할때에는 그 드레스를 입는 신부를 생각합니다. 특히 웨딩드레스에는 결혼을 맞이하는 신부가 느낄 행복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즉 그 드레스를 입음으로써 일생을 통틀어 아름다운 순간이 될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 있어야 할 행복을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것도 강조한다. 그녀는 그 소망을 신부들에게 선사했다. 한 번 그의 고객이 되면 연줄로 인맥으로 널리 퍼져 작은 시장이 이루어 졌고 큰 시장을 이루어 냈다.

시대의 전환

20년이 지금 세대에서는 개성을 강조한다. 결혼의 선택권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앞에서 말할바와 같이 과거의 결혼식에서는 부모의 권한이 컸으나 세대를 넘어선 오늘같은 멀티미디어 시대에는 젊은이들의 개성이 그의 미래를 결정한다. 또 다른 사업도 웨딩시장에 뛰어들어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바로 ‘웨딩 컨설트’사업이다, 그 사업에 대한 컨설팅 전문가들이 과거에 직접적으로 갔던 시장을 중간에서 자문역활을 해 웨딩사업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결혼식때 사용되는 드레스,턱시도,예식장 경비, 식사비용등을 전문가적으로 상담을 해주어 웨딩사업자들에게 연인들의 부담을 경제적으로 줄이고 활용적으로 중간다리역활을 적극적으로 활동해 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 비전문가로 구성된 컨설팅사업자들이 웨딩시장에 뛰어들어 차떼기 식으로 그 사업을 엉망으로 만들어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들로 말미암아 웨딩샾을 방문한 연인들을 바르게 결혼식을 해주는 것이 어럽다는 것이다.

이명순 원장은 이러한 문제를 지적해 직접 웨딩사업의 1차 상담사로 나서 연인들을 향한 웨딩사업을 바르게 인도하고 있으며 신랑,신부들의 웨딩디자인을 그들의 개성을 생각해 부적합한 부분을 제거하고 있다. 웨딩사업에는 항상 고객이 2명이라는 것을 명시하면서 말이다.

이원장은 오늘의 웨딩사업에 관해 “과거보다 오늘의 웨딩 디자이너들이 그 가치관이 상실됐고 과거보다 디자이너의 주체성과 책임감이 없는 것이 가슴 아픔니다. 모두가 컨설팅업자들이 중간에서 웨딩사업을 통제해 현재의 시장은 졍확한 정보를 줄 수 있어도 체계가 없어보이고 혼란한 시장같습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그는 일차적으로 웨딩상담사도 겸해 웨딩사업을 이끌고 있다. 행복한 추억을 희색빛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충실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원장은 요즘 젊은이들을 향해 “다행이도 인터넷 시대인 오늘에는 많은 연인들이 내보다 많은 웨딩 정보를 갖고와 상당에도 의미가 있고 다양한 지식으로 결혼식을 결정짓는것을 볼때에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초지와 그녀를 향한 사랑

지난 2월 12일부터 3일간 중국 칭다오시의 쇼핑 관광명소 자리잡고 있는 바이라광장백화점에서 첫 한류웨딩페어를 개최했다. 이때 국내 3개의 브랜드가 참가했는데 주객으로 이명순웨딩이 큰 호평을 받았다.

중국웨딩디자이너 경향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이때도 이원장은 여성의 청순미와 우아함을 강조한 ‘심플라인’ 웨딩드레스를 선보여 관객들로 큰 호평을 받았다. 이때 다양한 국내 브랜드의 웨딩드레스가 선보였지만 이원장에게 “개성있다. 처음보는 청순함이다. 여성의 숨겨진 미를 잘살렸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원장은 “이번 무대를 통해 중국의 웨딩시장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중국시장은 막 태동하여 급성장해서 한국 디자이너들의 역할이 큽니다. 그들과 함께 손잡고 활동을 한다면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브랜드를 크게 올릴 수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중국웨딩시장은 약 6000억위안(한화 100조원)에 달하는 거대시장이다. 한 해 1000만쌍이 결혼식을 올리고 매년 웨딩상품에 소비하는 비용도 20-30%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중국웨딩드레스는 가격이 저렴하다. 주문이 너무 많아 한 샾이 소화 못하는 지경이다. 한달에 몇백벌 혹은 몇천별 주문이 들어온다,.이때 한국웨딩디자이너들의 소포트 웨어가 합류하면 한국은 제2의 웨딩사업의 황금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원장은 “이렇게 발전한 중국웨딩시장에 한국 디자이너들끼리 공동작업을 하면 큰 이슈가 되고 공생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서로 자기만의 브랜드만을 고집하여 개별적으로 활동하면 한국웨딩업계에 대한 인상이 안좋고 이런 큰 시장을 놓칠수 있습니다”고 지적했다.

요즘 젊은 연인들은 웨딩사업하면 이명순웨딩을 최고로 손꼽는다. 그 시대에 맞게 ‘심플라인’을 모토로 발전시킨 그녀만의 웨딩은 신랑,신부들의 선호의 대상이다. 그때의 트랜드에 뒤떨어지지 않으면서 발전시켜온 모델은 오늘과 같은 개성시대에 딱 맞아 떨이지는 슬림형 케이스다.

이원장은“항상 당당한 것, 정직한 것, 성실한 것, 인내심을 가지고 한 길을 걸은 것이 지금의 내가 있게 한 것입니다. 심플하게 디자인해서 사랑받는 신부의 얼글에 맡게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 나의 목표이고 신부의 개성을 살리는 일, 스타일을 살려주는 일등을 항상 잊지않은 것이 저의 성공의 길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항상 ‘심플라인’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며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이 모델이 주류를 이를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명순웨딩하면 고객들이 떠올리는 것은 우아한 느낌 고급스러운 느낌, 소재는 항상 실크를 쓰는 장인정신, 세밀한 바느질, 세련된 코디네이션 그리고 ‘심플라인’에서 품기는 여성의 청순미와 우아함을 손 꼽고 그녀의 외길인생을 사랑한다.

또 한국의 톱스타들이 그녀의 웨딩을 선호한다. 대표적으로는 최민식, 이요원, 지진희 최근에는 이휘재같은 스타들이 이명순웨딩을 입었다. 그야말로 그들의 결혼식장은 이원장의 작품들로 빛났다.

이원장은“개인적으로는 류시원,이휘재를 인간적으로 너무 좋아힙니다.. 연예인들을 대상으로하는 웨딩디자이너 브래드의 장점은 그들 당자자만을 위한 디자인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가 웨딩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장인정신이 돋보일때입니다. 사회 공인들을 위한 드레스는 그 시대의 아이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한류스타들이 외국 수입브랜드를 입지 말고 국내 브랜드 웨딩 드레스를 입어야만 국가 이미지를 상승시킨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즉 그들을 위한 웨딩디자인은 큰 메리트가 있다는 것이다.

이명순 원장은 29살 때 결혼하여 지금 두딸을 둔 결코 평범하지 않는 어머니다. 21년 결혼생활을 하면서 남편과 두 딸을 사랑하며 살았는데 바쁜 디자이너 생활 때문에 그들을 못챙겨 주는 것이 후회스럽다고 한다. 그래도 남편의 넓은 이해심과 딸들의 아량에(?) 웨딩사업을 열섬히 임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고객들을 대할 때 마다 세대별로 틀린 개성이 넘친 모토가 있었다. 20대에는 고개들을 친구의 모습으로, 30대에는 언니의 모습, 40대에는 이모의 모습, 50대에는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들을 대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은 인간적이고 친밀하다.

그녀의 웨딩사업계의 모습은 과히 독복적이다. 2009년에 한국웨딩산업진흥협회 협회장을 역임했고 대표적인 웨딩페어쇼로는 2001년 프라쟈호텔 웨딩 컬렉션, 그해 9월 하얏트호텔 웨딩컬렉션, 2005년 리즈말튼호텔 웨딩컬렉션, 2008년 까르띠에 매장쇼, 2009년 일본동경페어쇼등이 있다, 앞으로 그녀만의 ‘심플라인’외길인생에 신의 축복이 있길 바란다.

임형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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