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손으로써 가치와 소임 다 해야”
“황손으로써 가치와 소임 다 해야”
배천조씨(白川趙氏) 대종회 조병직 회장
  • 대한뉴스
  • 승인 2012.01.22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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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의 족속은 친소상하(親疎上下)의 구별 없이 모든 종친 자손들은 유복지친(有服之親)이라, 복(服)을 입는 가까운 친척같이 하라!. 각자는 유념하여 조상의 부끄럼 없게 하기를 신신 부탁하노라.”(我族無親疎世世爲?麻)이는 배천 조씨 가문의 시조인 공화공 유고의 조부인 송태조 조광윤 황제의 유훈이다.《배천조씨세보(白川趙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공화공은 중국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맏아들인 연왕(燕王) 조덕소의 셋째 아들로 979년 난을 피하여 고려에 건너와 황해도(黃海道) 배천군(白川郡) 도태리(都台里)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는 900년대 소위 춘추시대 제후 국가들을 통일시킨 중국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손자로 왕손이 아닌 고귀한 황손이라고 하였다. 이에 배천군(白川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배천으로 삼아 가문을 이어왔다. 그로부터 천년 후인 올해가 시조 공화공께서 중국에서 배천으로 도동한지 어언 1031년이 되었다. 1011년 서거하신지 이래 1천년이 되는 해 한반도의 중심 서울에서 뜻 깊은 배천 조씨 시조 1000주년 기념대제가 열렸다. 바로 여기에 선조의 뜻을 계승, 실천하면서 문중의 영광을 되찾고자 노력하는 배천 조씨 대종회 조병직 회장이 있다.

배천조씨(白川趙氏) 대종회 조병직 회장 ⓒ시사뉴스투데이

그는 ‘배천 조씨 시조 1000주년 기념대제’에서 1000년 배천 조씨의 역사와 위상을 종친들과 함께 회고 하고 선조의 유지를 높이 받들고 숭조돈목은 문중의 소명이요, 책무라 하면서 반듯하고 명예스러운 전통명문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후손들의 몫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배천 조씨 문중이 진정 황손으로서의 값을 다하려면 그에 합당한 실질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Noblesse Oblise의 숭고하고 멋진, 참다운 황손으로 가치와 소임을 다 해야 하지 않겠냐며 1000여 년 지켜온 문중의 영예를 빛내기 위해 자긍심을 갖고 씩씩하게 매진해야함을 주장했다. 선조의 역사를 잊고 빠르게 변해만가는 현대사회에서, 이들의 예스럽고 숭고한 제(祭)는 우리들 각자의 조상에 대한 경각심마저 일으켜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배천 조 씨 종친회의 활동 목적이 궁금합니다. 또 주요 계획은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 배천 조 씨 뿐만이 아니고 어느 씨족이든 그 대종회의 역할과 임무는 거의 비슷합니다. 크게 세 가지를 꼽자면 숭조, 돈목, 후대 양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숭조라는 것은 자신의 근원을 찾고,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정성껏 모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돈목은 가족과 일가친척들 간의 정을 돈독히 한다는 뜻이지요. 또 작게는 종친회의 발전을 위해, 크게는 국가 사회의 발전을 위해 후대를 양성해야 할 책임이 저희에게는 있습니다. 적어도 조상들보다는 후세들이 더 발전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배천 조 씨의 연혁이 궁금합니다.
올해로 우리 배천 조 씨가 시조 공화공 제향을 모신 지 1,000주년을 맞았습니다. 시조 할아버지의 본명은 유고였는데, 한국에 오신 뒤로 갈지(之), 머뭇거릴 린(?), 지린(之?)으로 개명하셨고, 송나라 태조의 친 손자이십니다. 고려 경종 4년(서기 979년)에 황해도 배천 땅에 처음 오셨는데, 쉽게 말해 피난을 오신 겁니다. 당시 중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오신 거죠. 그 후 배천 땅에 정착하시면서 배천 조 씨 시조가 되셨습니다. 한자로 쓰기는 흰 백(白) 내 천(川) 인데, 白자를 색이 아닌 땅 이름(지명)을 나타내려 쓸 때는 백이 아니라 배라고 읽습니다. 그래서 배천 입니다. 그렇게 공화공께서 한국에 오셔서 생활 하시다 돌아가신 게 올해 1,000년이 된 거죠. 배천 조 씨는 바로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 조 씨는 천하제일성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궁금합니다.
중국에 백가 성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조 씨가 맨 첫 번째로 등장합니다. 이에 대해 조 씨가 송나라를 창건했기 때문에, 당시 책을 만든 사람들이 조 씨를 맨 앞에 둔 게 아니냐는 설도 있기는 합니다. 물론, 그런 점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조씨 성은 동아시아 문화 발전 역사의 긴 과정 중 비상하게 빛나는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송 태조는 대송을 세우고 나서는 난리를 평정하고 문민 정치를 펴, 어진 정치로 나라를 다스려 320여년 간 교육, 문학, 예술, 건축 및 과학기술 발명 상 모두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조 씨 성은 오랜 세월동안 백가성지수(百家性之首)의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고 합니다.

황해도 배천이면 지금은 북한 땅인데요. 그렇다면 현재 종친회가 남북이 분리되어 있는지요?
아무래도 시조할아버지께서 처음 황해도 배천에 정착을 하셨고, 또 후손들이 대대로 그 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하였기 때문에 현재 대종회의 사당도 그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6.25 사변으로 남과 북이 갈라져, 남한으로 피난 오셨거나 아니면 원래 이곳에 사셨던 분들이 주축이 돼 지난 1951년 대종회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에 있는 모든 배천 조 씨가 남한으로 피난 온 것은 아니고, 아마도 그곳 종친들께서 사당에 제례를 올리고 종중 활동도 하실 줄로 믿고 있습니다. 또, 종친의 수도 북한이 우리보다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남한에는 약 8만 명의 종친이 살고 계십니다. 남북을 합치면 대략 20만 이상이 될 것 같습니다.

배천 조 씨를 빛낸 주요 인물들을 소개해 주세요.
일단 우리 시조 할아버지를 먼저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역사적 배경을 먼저 말씀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뭐랄까요. 요새는 동북공정이다 뭐다 해서 우리 국민 중에 중국에 곱지 않은 시각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사실 오래 전부터 중국은 대국중의 대국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요즘 정서로는 거부감이 느껴지지만 당시의 고려와 같은 중국의 작은 주변국들은 조공을 바쳤습니다. 바로 그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비록 피난을 왔을망정 송나라 황제의 손자이다 보니 나라에서 아주 극진히 대접한 것으로 전해 옵니다. 시조할아버지는 관직이 금자광록대부 좌복야 참지정사라는 벼슬에까지 오르셨는데, 오늘 날로 치면 국무총리 급에 해당하는 관직입니다. 그리고 시조께서 서거하시자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폐지하였답니다. 그 뒤에도 그 아래로 10여 대가 계속 고관을 이어가셨습니다. 그 밖에 숙위공 할아버지도 계셨는데, 이 분은 조선 왕조의 개국 공신이지요. 또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신 문열공 초헌 선조 역시 배천 조씨 이십니다. 이 분들 외에도 지난 1,000년간 이 땅에 이름을 남기고 가진 선조들이 많이 계십니다.


지난 1997년도에 국내 최초로 족보를 시디로 제작해 화제를 불렀습니다. 그 제작경위가 궁금하고 그 후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궁금하네요.
요새는 뭐 IT화라고 하나요? 모든 정보를 컴퓨터 화하는 추세이다 보니, 그에 발 맞춰 족보도 CD로 만들면 우리 종친들이 앞으로 더 많이 족보를 볼 것이라 기대감에 제작한 것입니다. 국내 최초였지요. 그런데 막상 만들어 놓고 보니 전혀 엉뚱한 상황만 계속됐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족보를 찾아보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인데 이 분들은 컴퓨터를 잘 다룰 줄 모르고, 반대로 컴퓨터가 익숙한 청소년, 중장년층들은 족보에 별로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여기에서 이미 갭이 발생했습니다. 처음 제작할 때의 취지와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화제를 일으킨 것과는 별개로 그렇게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습니다. 3만원씩 받고 팔았는데 별로 사가는 종친이 없다보니, 나중에는 재고분을 그냥 하나씩 나눠 드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최근에 중국을 방문하셨는데요. 방문의 목적과 취지 또 성과가 궁금합니다.
예. 일가방문이지요. 지난 8월 중순에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시조 할아버지께서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피난을 오셨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다보니 송사나 중국 송 태조 후손들의 족보를 보면 이 공화 공께서 무후, 즉 아무 자손이 없는 것으로 기록 돼 있습니다. 앞서 지금 남북한에 20여만 명의 종친이 살고 있다고 제가 표현을 했는데, 그런 후손들이 중국 종친 족보 등에 무후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써는 하루빨리 시정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에도 송 태조의 후손들이 수십 만 명 생활하고, 또 그들이 이 땅의 역사 발전에 기여해 왔다는 것을 중국 종친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녀 온 겁니다. 사실, 전조록이라는 책에는 위 내용들이 다 쓰여 있는데 중국 종친 족보 자체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 족보에도 등재되어야 중국 종친들도 우리를 종친으로 알아보지 않을까요?
성과는 송 태조 파 후손의 대표자이신 조 수박 종친이 (渡韓趙氏始祖恭和公千年祭典紀念, 共起宋祖裔孫揚名大韓千年, 同期趙姓子弟光耀四海萬世, 풀이하면 한반도에 건너 간 조씨 시조 공화 공 천년 제전 기념: 송 태조 후손이 대한에서 명성을 드높인 천년을 함께 기원 원년으로 삼아 조씨 성 자제가 세계 만방에서 만세토록 찬란한 세상을 열어가기를 함께 기약하자)라는 강령문으로 배천 조씨의 실체가 현출되고 한국 배천 조씨와 중국을 위시하여 세계 도처에 거주하는 송 태조 후손이 하나임을 하나 됨을 천명함으로써 기대에 흡족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것 같습니다.

시조 공하공 1,000주년 기념 대제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인간사에 있어서 1,000년이라는 시간은 심히 장구한 세월입니다. 아무리 요즘 평균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100살을 넘게 사는 사람은 많지 않죠. 그래서 인생 70 고래회라는 말은 아직도 쓰여 지는 말이지요. 그러니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며 자신과 관련된 1,000주년 행사를 맞이한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입니다. 천재일우니 천재 난봉이니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이지요. 마침 올해가 우리 시조 할아버지의 1,0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종친들과 함께 이 제사를 예년보다는 좀 격이 다르게 장중하게 모시는 것이 천년동안 후손을 온전히 보호해 명문 거족이 되게 하신 시조께 대한 최소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지나간 1,000년을 회고하고, 아울러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1,000년을 전망하는 기회로 삼고자 대제를 모셨습니다.

사회의 어른으로써 우리 전통문화의 현대화와 관련해 희망사항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특히 앞으로 자라날 어린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대종회의 활동과 덕목들, 숭조, 돈목, 후대 양성이 다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인생의 목표는 달리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자신의 근본을 찾게 되고, 그러면서 조상을 찾아 음덕을 기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내야 하지만, 그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다면 더욱 돈독하게 지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부모든 자녀가 자기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게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후세를 양성하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 종중의 목적과 임무라는 게 우리 인생의 목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거기서 그치지 말고 지역 사회와 국가에 공헌함은 물론, 더 나아가 인류의 복지 증진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회장님이 평소 생각하시는 인생의 가치관이 궁금한데요. 여기에 더해 앞으로 배천 조 씨의 후대들이 가문을 위해 해야 할 노력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우선 각자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윤리 도덕적으로 자질을 갖춘 인간이 되어서 사리보다는 공익을 앞세우고 조금이라도 지역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 복지에 기여하는 것이 조상에 대한 도리라는 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정적 문제가 어떻게 보면 거짓에서 다 비롯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진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떤 사태를 해결해야 할 때는 아무리 주위의 어려움이 많더라도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용기를 가지셨으면 합니다. 또 스스로 부족한 면을 채워나가는 즉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늘 채워야 합니다. 배우고 또 보태 항상 인격이 충실한, 그런 여러분들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승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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