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다빈치 코드]의 개봉에 즈음하여...
영화[다빈치 코드]의 개봉에 즈음하여...
  • 대한뉴스
  • 승인 2006.05.0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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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개봉예정으로 있는 영화 ‘다빈치 코드’ 때문에 사회적인 논란이 일고 있다. (사)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에서 지난 4월 7일 서울중앙지법에 영화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하면서, 만일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극장 앞에서 실력행사를 해서라도 상영을 저지하겠다는 의견을 밝혀 논란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한기총이 제출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의 핵심은 ‘다빈치 코드’가 예수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아이를 뒀으며 그 혈통이 고대 프랑스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온다’는 것이다.

사실 동명의 원작소설 ‘다빈치 코드’가 국내에 번역, 출간됐을 때부터, 그리고 이를 톰 행크스가 주연을 맡아 영화화하기로 했을 때부터 이 같은 논란은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었다. 그만큼 ‘다빈치 코드’는 아무리 허구의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기독교인은 물론이고 상식적으로 예수와 기독교를 바라보던 일반 독자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안겼기 때문이다.

범죄 스릴러 형식으로 진행되는 ‘다빈치 코드’의 핵심은 “‘성배(Holy Grail)’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잔’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담은 여성의 태를 의미 하고 이런 ‘성배’의 비밀을 간직해온 시온수도회가 있었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기독교계는 시온수도회를 앞세워 이 같은 비밀을 폭로하려는 ‘이단’들을 철저히 탄압해왔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설적 재미를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시온수도회의 일원이었으며 그는 이 같은 비밀의 암호를 그의 그림인 ‘다빈치 코드’에 숨겼다는 내용 등이 추가된다. 기독교계 입장에서 ‘다빈치 코드’의 가장 큰 논란의 쟁점은 역시 ‘예수가 인간과 결혼해 후손까지 뒀다’는 부분과 소설이 이를 통해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예수 부활의 부정’이다. 한기총 역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서에서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모독하고 부활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비록 환상 장면이기는 했으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는 평범한 삶을 사는 내용을 포함시킨 1988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이 교단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 21세기형 영지주의 (Gnosticism)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에 대해 무척 인상적인 대목을 여러 곳에서 노출시킨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오른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요한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것, 그 ‘성배’는 다름 아닌 그림 속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 등이 그것이다. ‘다빈치 코드’에 등장하는 이러한 내용들은 초기 기독교 내부에서 이단으로 몰린 그노시스파(Gnosticism ; 영지주의)의 교리와 방법들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영지주의(靈知主義)는 그리스어로 ‘비밀스런 지식’을 뜻하는 ‘그노시스 gnosis’에서 유래된 것으로, 명칭이 암시하듯이 신적 계시에 의해 얻어지는 비밀스런 지식이야말로 인간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영지주의의 전통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이성과 계몽에 의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런 까닭에 기록에 의해 전승되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아의 신비스런 직관에 의해서만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을 부정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식들과 기존의 기독교 사상의 지식들을 구분하기위해 기록하는 방법 대신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사고는 교육이나 경험적 관찰 등과 같은 이성의 부단한 훈련을 강조하는 주류 기독교 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역사에 나타났다는 테제를 파괴하였고, 반이성적인 종교사상으로서 완전히 초월적인 계시만을 주장하여 개인의 책임이 설 자리를 없애버렸다. 이에 따라 주류 기독교 진영에서도 영지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들이 마련되었다. <신약성서>를 정경(正經)으로 확정하고 그 외에 학문적 연구나 교훈이 될 만한 책들은 외경으로 분류했으며, 주교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사도들에게 근거를 둔 교회들이 확인해준 전승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 사상이 체계화되도록 자극했으며, 자유·구속·은총 등, 초기 기독교의 설립자들이 잠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주제들을 환기시켰다. 그 후 영지주의는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요즈음 기독교를 소재로 하거나 초기 기독교가 존재하던 역사를 소재로 하는 문학이나 영화를 통해 영지주의적 관점이나 그들이 사용했던 알레고리적 방법들이 심심치 않게 보여 진다. ‘다빈치 코드’를 포함한 이런 종류의 내용들은 기독교계 입장에서는 ‘성령으로 잉태해서 죽은 후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임재하신’ 예수의 신성(神性)과 부활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모독하는 것이다. 또한 위의 내용처럼 ‘인간으로서 예수’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 제자들을 다시 만난 후 승천했다는 복음서의 핵심마저도 전면 부정하는 것이 된다. 특히 예수의 부활은 잘 알려진 대로 기독교 교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강조했던 것처럼, 복음서에서 예수 스스로가 밝혔듯이, 예수는 못 박혀 구멍 뚫린 육신 그대로 부활했고 이를 믿는데서 출발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한기총에서 이토록 영화 상영을 반대하는 이유는 기독교 정신을 훼손했고, 왜곡된 사실을 예술이란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프랑스에서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가 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기독교 자체가,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근본이 부정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 넘게 세계의 진리라고 추앙 받아온 그리스도교가 허구위에 쌓아올린 성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절대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거짓된 것을 가지고 철저한 상업주의와 부합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논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21세기에 신앙적인 순교를 각오하면서 실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미다.



◆ 신성모독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한기총에서 영화 ‘다빈치 코드’ 특별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는 홍재철 목사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독교의 부정을 의미한다. 예수의 구주로서의 위치가 흔들리면 기독교는 존재가치가 사라진다. 적그리스도 적 발상이며, 기독교 근간을 흔드는 망상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옳은 말이다. 내용으로 보자면 백번 옳다. 그런데 그 대응하는 방법이 상영 절대불가를 외치며 법적으로 해결을 하고 관철 되지 않을 경우 “몸으로, 실력으로 라도 막는다” 라는 것인데, 그 부분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정당성을 부여받기 어려운 부분이다.

모든 국민이 다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법치 국가이다. 민주주의 국가와 법이라는 것은 사회적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어떠한 방식의 자유도 용납되고 보장되지만, 다른 구성원들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사회적 계약에 반하는 부분은 제재를 받게 된다. 계약의 내용은 지역적인 부분과 전통, 문화 등에 따라서 조금씩 달리 할 지라도 ‘민주주의는 합의와 사회적 계약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어떤 집단이던지 단체로 의견을 표출하고 행동함에 있어서 그 정당성을 부여 받으려면 사회적인 합의의 도출이 있어야 가능한 부분이라는 것 또한 반론의 여지가 없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번 경우는 어떠한가...?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망상이기 때문에 결사반대와 저지를 하겠다는 방법이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면...?

필자도 알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에 약간의 비약이 있음을.

필자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와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왜 행동을 보여주기 전에 먼저 국민적, 사회적 계몽과 여론의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나 하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필자가 몸담고 있는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왜 사회의 양심을 자처 하면서 이런 사회적 문제에 중재자 역할을 해내지 못했나. 그리고 내용을 보도하는 부분에서도 중립과 객관 운운하면서 자극적인 소재 찾기에 급급했나.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금 반성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로 작용한 것은 철저하게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는 영화산업과 자본이다. 그리고 금기시 하는 부분을 소재로 다루어 이를 통해 대중의 관심을 높여보려는 차원 낮은 영화 마케팅의 고질적인 병폐가 큰 몫을 했다. 이들에게는 돈이 된다면 건드리지 못할 소재가 없고, 그 소재가 종교이건 정치이건 그 폐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적 논란이 가열될수록 관객의 수는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철지난 착각에 빠져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철지난 착각이 지금까지의 전례를 비추어 볼 때 전혀 근거 없는 발상만은 아니란 것이 또 하나의 딜레마다. 분명 사회적인 논란들이 자신들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경제적 상승변수임을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일부 기독교 단체의 강경한 반응에도 ‘자신들은 손해 볼 것 없다’ 라는 속셈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 단체들과 카톨릭 교단에서는 이러한 마케팅 상술에 휘말리지 않으려 한다. 그 이유를 ‘낮은 수준의 공격에 대응하면 스스로 수준 낮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므로 서로 똑같아질 뿐이다’라고 공통된 의견을 내놓으며 자중하고 있다.

‘기독교 근간을 위협하는 망상이다...?’ 그렇다. 그럼 그런 망상을 소재로 한 영화한편이 기독교의 붕괴를 가져올까...? 아니 하다못해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나 기독교인들에게 오히려 큰 폄하요 모독이 되지 않을까 한다.

기독교는 20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 속에 신앙이자 진리이자 문화로 자리 잡은 종교요, 사상이다. 그간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많은 도전과 박해를 이겨내며 굳건히 자리 잡은 세계적인 종교가 한낱 영화 한편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수긍하기 힘든 말일 것이다. ‘이들은 거짓된 말로 기독교의 근본을 부정한다.’ 사실 그렇다. 그럼 그것의 진위 판단은 대중에게 맡겨주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까...?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이요 아량이고,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보여준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의 참 모습일 것이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장차 알려져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진실은 언제나 밝혀지기 마련이다.



◆ 대중과 여론

한국의 대중들에게 ‘한기총’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떠올리는 장면들이 있다. 초등학교 교정에 목이 잘린 채 덩그러니 앉아 있던 단군상과 사학법 관련해서 시청 앞에서 십자가를 지고 퍼포먼스를 하던 모습들이다. 그때마다 주장했던 논리와 이유는 분명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 논리와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함께 자신들의 경험 치에 비추어 일의 전후를 판단할 뿐이다. 그리고 인상적이었던 사건의 일부만을 기억에 남겨둘 뿐이다. 한국의 대중은 기독교가 몇 개의 협회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심지어 카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이런 실정 속에서 또다시 일반 대중들의 의견은 배제되고 영화사와 기독교간의 실력행사 대치구도로 비쳐진다면, 그로인해 쏟아질 대중 여론의 냉소는 고스란히 영화계와 기독교계가 짊어져야할 몫이 되는 것이다. 영화사야 상업주의 논리로 움직이는 곳이니까 이러한 문제에 항상 대비하고 그에 따른 각오가 되어있지만, 경제논리로 움직이지 않고 신앙과 신념의 문제로 움직이는 종교계는 어떠한가? 실제로 영화가 심각한 문제 제기와 논거가 뒷받침된, 기독교계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문제작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허구다. 영화상영후 대중들의 반응이 ‘이런 하찮은 상업주의 영화 한편 때문에...’,‘누구를, 무엇을 위한 상영 논란이었나?’ 라는 질문을 던질 때, 결사반대를 외쳤던 기독교계는 대중들에게 어떤 답변을 줄 수 있을까...?



◆ 한국적 똘레랑스

‘똘레랑스 (tolerance)’ 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를 얘기 하자면 ‘관용’이라는 뜻이 된다. 원래는 ‘허용 오차’를 뜻하는 공학용어 이지만 사회적인 의미를 갖게 되면서 사회적, 문화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흔히 프랑스 사회를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고 말하고, 한국은 거기에 비해 ‘정’이 흐르는 사회라고 말한다. 똘레랑스가 가지는 사회적인 첫 번째 의미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다. 즉, 상대방의 정치적 의견, 사상, 상대방의 이념 등을 존중하여 자신의 사상, 이념도 인정받는 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로는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 이다. 첫 번째 의미가 나와 남 사이의 관계 또는 다수와 소수 사이의 관계에서 나와 남을 동시에 존중하고 포용하는 내용을 품고 있다면 두 번째 의미에는 사회적 계약으로 부여해준 권력에 대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의지가 내포 되어있다. 즉, 권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지되는 것도 아닌 한계자유를 의미한다. 가장 흔한 예로 방송이나 영화를 보면 프랑스에는 길거리에 휴지통이 따로 없어 보인다. 길에 아무렇지도 않게 휴지와 쓰레기를 버린다. 그렇게 버려진 쓰레기들을 청소부와 청소차량이 수시로 치운다. 이런 상황을 프랑스인들은 “버리는 사람이 있어야 치우는 사람들이 실업자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똘레랑스’가 흐르는 프랑스의 사회다. 우리네 정서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수긍이 가고 본받아야 될 부분이 많이 있기도 하다. ‘남을 존중해줌으로써 자신도 존경을 받는다’라는 말은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한기총과 본지와의 두 차례 인터뷰를 통해 필자가 느낀 점은 옳은 얘기와 주장을 하고 있으면서도 대중들에게는 전혀 어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일까...? 그 이유는 기존의 인상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중과의 합의를 통한 의견도출의 과정이 빠져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기총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내부적인 숙고가 있었던 것 같고, 조심스럽게 세상과 대중을 향해 관용과 합의의 손을 내밀려 하고 있다. 그럼 영화계는 내민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나? 종교계에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요구하지만, 과연 영화계는 진정 종교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려는 순수한 의지가 있는가? 여전히 장사가 될 만한 것에만 매달려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다빈치코드’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소재로 한 영화이니, 그 내용과 그것 때문에 일어날 파장에 대해선 무책임하게 회피하고 오로지 흥행과 홍보에만 열을 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하나다.

대한민국도 남들에게 보여주어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문화수출국의 하나로 발돋움 한 만큼, 우리만의 ‘문화 똘레랑스’를 만들어 보자. 너무 코앞의 이익이나 불편함에 발끈하지 말고 관용으로 바라보고 서로를 대하는 성숙한 문화를 이루어 보자. 우리에게는 똘레랑스를 이루어낸 저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정이 넘쳐흐르지 않던가? 우리의 문화와 삶에 넘쳐나는 정만큼 한국적인 ‘똘레랑스’를 이루어 보자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큼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믿는다. 이번 일을 기점으로 종교계는 종교계대로 영화계는 영화계대로 서로를 가감 없이 바라보고 조명하여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훌륭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좋은 계기로 마무리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글_임규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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